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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 이수명 좋다. 좋다아. 아아. 좋-다아, 하면서 읽고 있는 시집.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이 있고 나는 문득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한다. 내려오는 투명 가위의 순간을 깨어나는 발자국들 발자국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발자국에 맞서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있고 왼쪽 비는 내리고 오늘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육체가 우리에게서 떠나간다. 육체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 돌아다니는 단추들 단추의 숱한 구멍들 속으로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 이수명,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2011. 10. 16.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장정일 1. 얼마나 간단한가.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켜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 장정일, 2. 목소리, 가 아닐까 생각했다. 목소리 때문에.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3. 으, 역시 못하겠다. 난 언제부터 이렇게 제약이 많은 인간이 되었나. 그래도 며칠 전에 했던 두 개의 대화가 왠지 위로가 된다. 헤에. 둘 다 모르겠지만, 아무튼 두.. 2011. 10. 8.
『뭐라도 되겠지』 - 김중혁 1. 소설가 김중혁의 첫 산문집 『뭐라도 되겠지』(마음산책, 2011) 와우북에서 사서(나오자마자!라고) 재미있게 읽었다. 재미를 넘어 정말 '웃긴' 책이다. 주의사항은 뭐 마시면서는 읽지 말것. 문장의 급습으로 입에 물고 있던 걸 뿜을 수 있음. (웃겨서) 이런 책은 한 700페이지 쯤 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게 아까웠어! 재밌어서! 페이스북에 방울토마토 먹으면서 보다가, 방울토마토가 폭발해서 (토마토도 보다가 웃겨서 빵터진 거라고) 새 책에 튀었다고 썼는데, 그 덕에 "토마토도 웃기는 책", "맛있는 책" 등등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2. 예전에 2학년 땐가 소설론(맞나...?) 수업시간에 김중혁 조 발표날이었다. 보통 PPT로 발표 하고 토론하고 하는 건데, 이 조의 조원 한 .. 2011. 10. 6.
나날들 - 심보선 심보선의 새 시집. 발문이 진은영 선생님이다. (무려!) 나날들 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했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婚期)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밭을 헤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은 흐르고, 엽서 속 글자 수는 줄어들고, 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 2011. 10. 6.
사슬 - 이성복 꾸벅꾸벅 너무 졸린데, 일찍 자려고 했는데 또 세 시다. (.....) 이것만 적어놓고 자야지. 얼마 전에 사슬을 생각했다. 그 전에 그네를 생각했고, 그네를 생각하다 그네의 사슬을 생각했다. 아니면 사슬을 생각하다 그네를 생각했던 것일 수도. 내가 가장 가까이 떠올릴 수 있는 사슬이니까. 시간과 시간 사이에, 시간과 사람 사이에 놓인 사슬들을 좀 생각하다가. 사슬을 생각할 때 '사슬 시가 있었는데 뭐였더라' 하며 정확히 못 떠올렸었는데, 읽다가 만났다. 사슬 내가 당신 속으로 깊이 들어갔을 때 나는 아직 당신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웃는 것 같았고 우는 것 같았고 온갖 슬픔과 기쁨이 하나로 섞인 그 소리는 나의 머리끝 발끝을 끝없이 돌아나갔습니다 그 소리에 잠겨 나도 당신도 잊혀지고 헤아릴 수 .. 2011. 10. 6.
<생명연습> - 김승옥 (1962) 김승옥 소설가의 등단작.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 』(문학동네, 2011)에서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서울대 불문과 60학번 김승옥이 있었고 같은 학교 독문과 60학번 이청준이 있었다. 둘 다 문학을 사랑했고 또 둘 다 가난했다. 1961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다음 학기 등록금이 걱정되었던 김과 이는, 김의 주도 아래 이런 작당을 한다. 우리 신춘문예에 한번 덤벼보자. 까짓거, 한국 문학 별거 있냐. 붙는다. 붙으면 그 상금으로 다음 학기 등록을 하고 혹여나 떨어지면 미련 없이 입대하자. 아니나 다를까, 김승옥은 1962년 1월 1일자 한국일보에 등단작 「생명연습」을 실었다. 이청준은? 입대했다. (309쪽) (후략) 마지막의 "이청준은? 입대했다." 에서 나도 모르게 "푸학"하고 .. 2011. 10. 5.
잘 알지도 못하면서 - 김민정 도서관 열람실에서 읽다가 빵(!) 터져서, 입술을 깨물고 읽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광어를 회 뜨다 손을 떠버린 엄마 응급실로 데려가 침대에 누이는데 담당 의사 이름이 글쎄 '김근'이시다 어머, 뿌리 근을 쓰시나요? 성함이 제가 아는 분이랑 같아서요 그는 바느질로 바빴다 시인 중에 있거든요, 金根이라고…… 바느질로 바쁜 그는 아무 말 없었고 그런 말이 있었다, 비호감이라고 -- 김민정,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2009, 문학과지성사 아무 '말' 없는 그에게 '비호감'이라는 '말'을 선물하여, 그는 이제 '비호감'이라는 말이 있는 '어쩌면 뿌리 근' 남. 그녀가처음느끼기시작했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김민정 (문학과지성사, 2009년) 상세보기 2011. 10. 5.
봄이 왔다 - 진은영 역시 할 일이 있으면, 더 많이 읽는 것일까. 진은영 선생님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중 한 편. 봄이 왔다 사내가 초록 페인트 통을 엎지른다 나는 붉은색이 없다 손목을 잘라야겠다 -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2003, 문학과지성사 시집을 읽을 때는 첫 번째 장 부터 차례차례 읽지 않고 그냥 펴진 곳부터 점차 뒤로, 혹은 앞으로 가며 내 마음대로 읽는다. 이 날도 내 마음대로 읽다가, 이 시를 만나고 정말 입으로 "으아악!"이라고 외쳤다. "손목을 잘라야겠다" 를 보고. 도대체 봄은 어떻게 오는가. 매해 봄을 기다리는 것 같지만, 사실 봄을 기다리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왠지 봄은 꼭 기다려야만 할 것 같고, 자라나는 푸른 새싹들은 무조건 긍정하기만 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2011. 10. 2.
데미안 + 프롤로그 같은 부분인데, 밑줄 긋고 몇 줄 읽다 보면 또 밑줄 긋고 싶어지고. 읽는 중.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아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8쪽)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9쪽).. 2011. 8. 30.
<일기>, 황동규 하나 더 적어야지. 이 시는 2학년 2학기 때, '창작의 이론과 실기'라는 과목 중 시창작 수업 시간에 외웠던 거다. ('창작의 이론과 실기' 과목은, 소설창작, 시창작, 영상콘텐츠 창작, 이렇게 세 개의 선택이 있다.) 아 이 수업은 이기성 선생님의 수업이었다!!!!!! 아직도 『불쑥 내민 손』(문학과지성사, 2004)에 선생님 싸인 못 받은게 정말정말 아쉽다. (+ 그 이후에 시론 강의도 들었었는데, 『타일의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10)에 싸인 못 받은 것도. 아 그리고 진은영 선생님의 니체 수업도 들었었는데, 『우리는 매일매일』에도 싸인 못 받았다. 한 학기 내내 쑥스러웠던 건가. OTL.) 이 시 외운 날, 브라더를 만났다. (체화당 간 날) 시 외우는 거 동영상 찍어 준다고 몇 번이고 시.. 2011. 8.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