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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빠진 독서

사슬 - 이성복

by 두번째낱말 2011. 10. 6.


꾸벅꾸벅 너무 졸린데, 
일찍 자려고 했는데 또 세 시다.
(.....)
이것만 적어놓고 자야지.

얼마 전에 사슬을 생각했다. 그 전에 그네를 생각했고, 그네를 생각하다 그네의 사슬을 생각했다.
아니면 사슬을 생각하다 그네를 생각했던 것일 수도. 내가 가장 가까이 떠올릴 수 있는 사슬이니까.
시간과 시간 사이에, 시간과 사람 사이에 놓인 사슬들을 좀 생각하다가.
사슬을 생각할 때 '사슬 시가 있었는데 뭐였더라' 하며 정확히 못 떠올렸었는데,  

읽다가 만났다.
 

사슬

  내가 당신 속으로 깊이 들어갔을 때 나는 아직 당신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웃는 것 같았고 우는 것 같았고 온갖 슬픔과 기쁨이 하나로 섞인 그 소리는 나의 머리끝 발끝을 끝없이 돌아나갔습니다 그 소리에 잠겨 나도 당신도 잊혀지고 헤아릴 수 없는 윤회의 고리들이 반짝였습니다 반짝임 사이로 어둠이 오고 나도 당신도 남이었습니다 


-- 이성복, 『이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당신 안에 있어도 바깥에 있으며, 웃으면서도 울고, 슬픔도 기쁨도 같이 엉켜 머리끝과 발끝을 끝없이 돌아나가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도 떠오르고. 


한 개 더 적고 싶어서 하나 더 적어야겠다.


노을 

  당신이 마냥 사랑해주시니 기쁘기만 했습니다 언제 내가 이런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당신 일만 생각했습니다 노을빛에 타오르는 나무처럼 그렇게 있었습니다 해가 져도 나의 사랑은 저물지 않고 나로 하여 언덕은 불붙었습니다 바람에 불리는 풀잎 하나도 괴로움이었습니다 나의 괴로움을 밟고 오소서, 밤이 오면 내 사랑은 한갓 잠자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 이성복, 같은 책.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배도 안 고프고, 

"해가 져도 나의 사랑은 저물지 않고" 
지구의 시간도 무색하게 하며,

"나로 하여 언덕은 불붙었습니다"
얼마나 못견디게 뜨거웠으면. 

밥도 잠도 없이 지구를 거스르는 이 뜨거운 사람은, 
사실 "풀잎 하나도 괴로움"인 여린사람. 
그렇지만 이 사람은 비록 '나'가 "풀잎 하나"에도 괴로울 지라도,
"당신"은 나를 밟아도 된다고 하는 사람.  
"나의 괴로움을 밟고 오소서,"라고 "당신"에게 외치는 사람. 
"당신"에게 밟히기 위해 뜨거운 마음 "밤"으로 아닌척 가리고 "한갓 잠자는 나무"가 되는 사람. 





+ 아 그런데 이 시집 제목이 정말 정말 좋다. 제목 마저도 시. 그리고 나는 '여름'이 들어간 것을 좋아하는 듯. 


그여름의끝(문학과지성시인선86)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시
지은이 이성복 (문학과지성사,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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