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의 새 시집.
발문이 진은영 선생님이다. (무려!)
나날들
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했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婚期)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밭을 헤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은 흐르고, 엽서 속 글자 수는 줄어들고, 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2011
"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
어제 들고 나가서 지하철에서도 읽었는데!
겉표지가 가방 속에서 무지 긁혀서 조금 슬픔.
(겉표지가 조금 닳는다고 속 안의 텍스트가 헤지는 것도 아니지만,
왜 이렇게 깨끗한 겉표지에 집착하는가....
예전에 엄마가 "그렇게 아끼기만 하지 말고, 좀 읽어라."라고도.
- 얼마나 아끼면 아예 안 읽는가. (ㅋㅋ)
아무튼, 심보선. 심보선은 그래도 심보선.
심보선, "너는 말이야"(<'나'라는 말> 에서) -- 요건 진은영 선생님의 발문을 좀 따라함.
+ '그래도'심보선.
'그래도'라는 말이 붙어 있군.
조금 더 읽고 왜 떠오른 단어가 '그래도'였나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첫 시집에서 봤었던 '전전긍긍함'이 덜 해졌다.
옛날의 심보선 시집의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청춘>),
"나는 전전긍긍 살아간다"(<어찌할 수 없는 소문>),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삼십대>)
등을 보면 뭔가 '나'에 대해서 끙끙거리는 모습이 들어난다. 스스로를 고민하는 것.
이번 시집은 심보선 말대로 '같이' 쓴 느낌이랄까. (문지에서 촬영한 낭독회 동영상을 보니 이번 시집은 여러분들과 같이 쓴 거라고 이야기했다.)
좀 더 '나'보다 '우리'에 대한 고민. 그리고 '우리' 속의 '나'에 대한 고민.
뭐 조금 더 읽어보아야겠지만. 아무튼, 요.
(보선 님도 이제 '청춘'을 넘어 간 사십....대..라......라고 이야기하면 내가 나쁜가.....!)
그런데 난 아직 전전긍긍 시가 더 좋다. 읽힐 때 많이 읽자. 그런 의미에서 <청춘> 한 번 더 읽고 자야지.
나 아직 청춘이고 싶으니까. 헤헤.
(2011.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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