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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빠진 독서

심보선 하나 더

by 두번째낱말 2011. 8. 14.


심보선 하나 더 
<먼지 혹은 폐허>(『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 지성사, 2008)


<먼지 혹은 폐허>

1

  세상은 폐허의 가면을 쓰고 누워있네. 그 아래는 폐허를 상상하는 심연. 심연에 가닿기 위해, 그대 기꺼이 심연이 되려 하는가. 허나, 명심하라. 그대가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대를 상상한다네. 그대는 세상이 빚어낸 또 하나의 폐허, 또 하나의 가면, 지구적으로 보자면, 그대의 슬픔은 개인적 기후에 불과하다네. 그러니 심연을 닮으려는 불가능성보다는 차라리 심연의 주름과 울림과 빛깔을 닮은 가면의 가능성을 꿈꾸시게.


2

앉아서 돌아가신 아버지.
장롱 속에 숨어 우시는 엄마.
영영 짖지 않는 개.
등뼈 모양으로 시든 나무.
한데 뒤섞여 손안에서 비비면 모래바람이 되는 것들.
까칠까칠한 헛것들.
고개 돌려 외면하니 그제야 매혹이 되는 것들.


3

  기억의 한편을 꾹 누르면 흐릿한 풍경 하나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뽑혀 나오네. 나는 그것에 선명해질 때까지 온 육신을 흔들며 날뛰는 존재.

  운명을 믿고
  구원을 저주하고
  굴욕 직후에 욕망하고
  태양을 노려보며 달빛을 염원하고
  상상의 무반주 랩소디에 맞춰 덩실덩실춤추다가
  궁극적으로는, 그렇지, 완벽하게, 치명적으로, 넘어지는
  거지.


4

  이 유형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평생 나는 누구이며 나의 삶은 어디로 향해 가는가? 라는질문을 한다. 이들은 내향적이고 감정적인 기질로 속으로 고민을 하다 결론을 내리면 평소와는 다르게 단호해져서 주변을 당황스럽게 한다. (MBTI 성격유형 분류에 따른 INFP, 소위 탐구가형에 대한 기술.)


5

  오전의 정적과 오후의 바람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불가역의 시간.
  꽃이 성급히 피고 나무가 느리게 죽어가는 이유.
  뭐, 그렇고 그런, 그러나,
  일순 장엄해지는 
  찰나의 무의미.
  혹은
  무의미의 찰나.


6

  "예측 불가능한 사로운 창조가 우주 내에서 면면히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는 주제에 다시 한 번 돌아가려 한다. 나로서는 언제나 이 창조를 경험하고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내게 일어나는 일을 아무리 상세히 설명하려 해도 소용없다. 발생하는 결과와 비교 해볼 때 나의 표현은 얼마나 빈약하고 추상적이고 도식적인가. 그 표현을 실현시켰을 때 이와 함꼐 예측할 수 없는 무rien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녀가 어느 날 전화로 읽어준, 앙리 베르그송, 『사유와 운동』의 일부.)


7

  그리하여 연금술사는 평생토록 만든 황금들을 백일 안에 죄다돌로 되돌려야 했네. 밥 먹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낮잠 잘 수 있는 단 하루의 평범한 하루를 신에게서 허락받기 위하여. 그 평범한 하루가 그에게는 평생 행한 기적들보다 더 기적적이었기에.


8

  내가 원한 것은 단 하나의 완벽한 사랑이었네. 완벽한 인간과 완벽한 경구 따위는 식후의 농담 한마디면 쉽사리 완성되었네. 나와 같은 범부에게도 사랑의 계시가 어느 날 임하여 시(詩)를 살게 하고 폐허를 꿈꾸게 하네.

  (그대는 사랑을 수저처럼 입에 물고 살아가네. 시장하시거든, 어여 나를 퍼먹으시게.)

  한 생의 사랑을 나와 머문 그대, 이제 가네.
  가는 그대, 다만 내 입술의 은밀한 달싹임을, 
  그 입술 너머 엎드려 통곡하는 혀의 구구절절만을 기억헤주게.
  오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꽃은 성급히 피고 나무는 느리게 죽어가네.
  천변만화의 계절이 잘게 쪼개져,
  머무를 처소 하나 없이 우주 만역에 흩어지는 먼지의 나날이 될 때까지
  나는 그대를 기억하리.


9

  그리하여 첫번째 먼지가 억겁의 윤회를 거쳐 두번째 먼지로 태어나듯이, 먼지와 먼지 사이에 코끼리와 태산과 바다의 시절이 있다 한들, 소멸 앞에 두렵지 않고 불멸 앞에 당혹지 않은 생은 없으리니.


10

  사랑을 잃은 자 다시 사랑을 꿈꾸고, 언어를 잃은 자 다시 언어를 꿈꿀 뿐.






+ 밑줄 그은 곳은 많지만 특히,

"사랑을 잃은 자 다시 사랑을 꿈꾸고, 언어를 잃은 자 다시 언어를 꿈꿀 뿐."

이거.


슬픔이없는십오초:심보선시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심보선 (문학과지성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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