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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빠진 독서

향기 - 이준규

by 두번째낱말 2011. 10. 31.

1. 일단 이준규의 시 두 편. 

향기

그것이 왔다
내일은 비가 왔다
비린 후회의 추억처럼
오늘은 마른 눈이 온다
벗은 살의 먼 기억처럼
거리를 지탱하고 사라지지 않는다
차를 한 잔 마시고
잊을 수 없는 것을 잊고
정교한 헛짓으로 번지는 벽
입을 다문 슬픔의 모습
그림자의 순간을 견디는
그림 없는 그리움
실패의 구축에 실패하다
완전한 망각을 권유하는 향기
그것이 왔다

-- 이준규, 『흑백』, 문학과지성사, 2006 

"내일은 비가 왔다"
"내일"인데 비가 "왔다"라니. 

"실패의 구축에 실패하다"
실패도 실패하는 것. 

읽고 나서, 뭔가 '아...어떻게 이렇게 쓰는 걸까.'하며 주눅들게 된다. (......) 

등단작이라는 <자폐> 하나 더. 

자폐 

누군가 나의 머리 잘린 꿈을 들여다보았다
햇빛의 유혹쯤이야 테니스공처럼 피하기 쉽지
허공을 가볍게 떠다니는 새의 부드러운 발톱들이
때론 창문으로 들어와 가슴을 할퀴곤 한다
새롭게 쌓인 책의 그림자 회칠한 벽 깨끗한 
바닥 위로 흐르는 구름 투명한 불꽃의 꽃나무
삐걱이는 각운의 목발 산책을 나서는 음모와
고인돌의 추억 사이에서 한숨 돌릴 때 말 없는 
붉은 지붕들 일제히 다리를 떨고 아 나에게
도끼 자루를 달라 그러면 정신없이 썩일 터이니
늑골을 씹어먹는 바람아 눈곱을 떼는 태양아 

-- 이준규, 같은 책 


"누군가 나의 머리 잘린 꿈을 들여다보았다"
"바닥 위로 흐르는 구름 투명한 불꽃의 꽃나무"

머리 잘린 꿈. 구름인데 바닥 위에서 흐르고. 


2.

어제 밤에 먹고 잔 것도 딱히 없는데(저녁을 늦게 먹은 거랑, 쥬스 좀 마신 것 밖에 없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난 이미 체해 있었다. 마루에서 끙끙거리다가 약 먹고 자고 일어나니 조금 나아져서, 죽도 먹고 그랬다. 아플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구나. 이렇게 아프면서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 나도, 있다고, 하는 것. 

오늘 오전의 나름의 계획이 있었는데, 아픈 '덕'에 아무 생각 안 하고 보냈다. 준비 해야 할 것, 봐야 할 것, 생각 해야 되는 것, 정리 해야 되는 것 다 저 멀리 접어 놓고. 은근히 핑계가 됐다고 좋아하고 있는 지도, 나. 좀 더 부지런히 보내야 될텐데.  

흑백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이준규 (문학과지성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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