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하나 더 심보선 하나 더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 지성사, 2008) 1 세상은 폐허의 가면을 쓰고 누워있네. 그 아래는 폐허를 상상하는 심연. 심연에 가닿기 위해, 그대 기꺼이 심연이 되려 하는가. 허나, 명심하라. 그대가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대를 상상한다네. 그대는 세상이 빚어낸 또 하나의 폐허, 또 하나의 가면, 지구적으로 보자면, 그대의 슬픔은 개인적 기후에 불과하다네. 그러니 심연을 닮으려는 불가능성보다는 차라리 심연의 주름과 울림과 빛깔을 닮은 가면의 가능성을 꿈꾸시게. 2 앉아서 돌아가신 아버지. 장롱 속에 숨어 우시는 엄마. 영영 짖지 않는 개. 등뼈 모양으로 시든 나무. 한데 뒤섞여 손안에서 비비면 모래바람이 되는 것들. 까칠까칠한 헛것들. 고개 돌려 외면하니 그제야 .. 2011. 8. 14.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