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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매일

잃어버리는 것.

by 두번째낱말 2011. 10. 28.



무언가를 잃어버리면 잃어버린 물건보다 '아, 내가 잃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생각이 먼저 난다. '안 잃어버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같은 것. 

카드를 잃어버릴 뻔 했으나, 그날따라 우연히 봉투에 전화번호를 적어달라고 했다. 몇 발자국 못 가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요샌 너무 많은 광고전화 때문에 모르는 번호는 또 잘 안 받지만, 우리동네 전화번호라서 갸우뚱 했다. 역시 동네 전화번호라는 게 있는 것이 또 참 좋았다. 아무튼 약간 우물쭈물하다 받은 전화에서 "카드 놓고 가셨어요"라는 고마운 목소리를 듣고 가서 찾았다. 우체국을 걸어 나오며 전화번호를 적었던 것을 생각하며 '오, 이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이 단순함이여. 

카드를 찾고 도서관으로 갔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동네 도서관이 있다는 것도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그렇게 많이 이용했던 건 아니지만(그동안은 늘 책이 더 많은 학교에 가면 됐으니). 네 권의 책을 반납하고 다시 네 권의 책을 빌렸다. 아무 종이도 쥐지 않은 채로 그냥 마음에 드는 책 네 권을 뽑았다. 서가의 책들을 손으로 쓸며 이번엔 '이렇게 기쁠 수가!'라고 생각했다. 책을 많이 읽고 싶어[각주:1] 좀 적어 볼까 하다가, 그냥 이런 독서계획 같은 것은 안 적기로 했다. 봐야할 책 보다는, 지금처럼 그때 마침 내 손에 잡히는 걸 보자고 생각했다. 자꾸 내게 뭘 지정해주지 말자. 요즘은.

그러니까 시간이 내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다니며 이런 시간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늘 무언가 '해야할 것'들이 있었다. 적어도 영어공부라도. 지금처럼, 이만큼 풍요로울 수 있을까. 그 언젠가 또, 물론 오겠지, 이런 시간 다시.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이 시간을 언젠가 기억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많이 바라보는 시간으로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발견하는 과정. 그 누구도 완전히 자기자신을 가진 적이 없었다고, 헤세가 그랬다(가온 말을 보곤 오랜만에 헤세 생각 한 번 더). 그러니 나를 가지지 못한 마음에 너무 불안해 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믿으며, 그리고 스스로를 좀 더 믿으며 지내자. 답답하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시간이잖아. 

보일러를 틀기 시작했다. 침대에 걸터 앉아 방 바닥에 가만히 발바닥을 대었다. 발부터 따뜻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역시 겨울은 이 느낌으로 온다. 오고 있다. 방이 따뜻하고, 이렇게 겨울이 오는 온도가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든다.  

 


  1. 욕망만 가득하고 실천은 부진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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