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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빠진 독서

봄이 왔다 - 진은영

by 두번째낱말 2011. 10. 2.


역시 할 일이 있으면, 
더 많이 읽는 것일까. 


진은영 선생님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중 한 편.

봄이 왔다

사내가 초록 페인트 통을 엎지른다
나는 붉은색이 없다
손목을 잘라야겠다 


-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2003, 문학과지성사 


시집을 읽을 때는 첫 번째 장 부터 차례차례 읽지 않고 
그냥 펴진 곳부터 점차 뒤로, 혹은 앞으로 가며 내 마음대로 읽는다.
이 날도 내 마음대로 읽다가, 이 시를 만나고 정말 입으로 "으아악!"이라고 외쳤다. 
"손목을 잘라야겠다" 를 보고.


도대체 봄은 어떻게 오는가. 
매해 봄을 기다리는 것 같지만, 사실 봄을 기다리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왠지 봄은 꼭 기다려야만 할 것 같고, 자라나는 푸른 새싹들은 무조건 긍정하기만 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생명력만의 시간이 "나"는 불편하다. 

이 시에서 봄은 작위적으로 온다. 달이 차고 해가 가며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봄은 "사내"에 의해 "초록 페인트"의 형태로 뿌려진다. 그것도 마치 "엎지"르듯 실수처럼.
실수처럼 온 봄을 맞는 화자의 "봄이 왔다"는 봄이 왔다!"가 아닌 "봄이(어쩌자고 기어코 또)왔다"고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 

억지로 마련된 "초록"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붉은색"일까. 
남들은 다 초록색 페인트를 뒤집어 쓰고 잘만 자라난다. 
하지만 시 속의 "나"는 "초록"색 의 세계로 가고 싶지 않다. 
또 하지만, "나"는 "나"를 초록이지 않게 해주는 "붉은색"은 없는 사람.
이러다가 "나"도 어쩔 수 없이 초록색으로 물들 것 같다.
그래서 "초록"이 되고 싶지 않은 "나"가 결국 선택한 것은, 

"손목을 잘라야겠다" 다. 

자기를 파괴하면서까지 가고 싶지 않은 곳. 
손목을 자르면서까지, 억지로 닮고싶지 않은 것. 
그래서 스스로 붉음을 만들어내고. 


봄은 뭘까. 

 
일곱개의단어로된사전(문학과지성시인선276)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진은영 (문학과지성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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