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 독서
봄이 왔다 - 진은영
두번째낱말
2011. 10. 2. 03:37
역시 할 일이 있으면,
더 많이 읽는 것일까.
진은영 선생님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중 한 편.
봄이 왔다
사내가 초록 페인트 통을 엎지른다
나는 붉은색이 없다
손목을 잘라야겠다
-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2003, 문학과지성사
시집을 읽을 때는 첫 번째 장 부터 차례차례 읽지 않고
그냥 펴진 곳부터 점차 뒤로, 혹은 앞으로 가며 내 마음대로 읽는다.
이 날도 내 마음대로 읽다가, 이 시를 만나고 정말 입으로 "으아악!"이라고 외쳤다.
"손목을 잘라야겠다" 를 보고.
도대체 봄은 어떻게 오는가.
매해 봄을 기다리는 것 같지만, 사실 봄을 기다리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왠지 봄은 꼭 기다려야만 할 것 같고, 자라나는 푸른 새싹들은 무조건 긍정하기만 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생명력만의 시간이 "나"는 불편하다.
이 시에서 봄은 작위적으로 온다. 달이 차고 해가 가며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봄은 "사내"에 의해 "초록 페인트"의 형태로 뿌려진다. 그것도 마치 "엎지"르듯 실수처럼.
실수처럼 온 봄을 맞는 화자의 "봄이 왔다"는 봄이 왔다!"가 아닌 "봄이(어쩌자고 기어코 또)왔다"고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
억지로 마련된 "초록"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붉은색"일까.
남들은 다 초록색 페인트를 뒤집어 쓰고 잘만 자라난다.
하지만 시 속의 "나"는 "초록"색 의 세계로 가고 싶지 않다.
또 하지만, "나"는 "나"를 초록이지 않게 해주는 "붉은색"은 없는 사람.
이러다가 "나"도 어쩔 수 없이 초록색으로 물들 것 같다.
그래서 "초록"이 되고 싶지 않은 "나"가 결국 선택한 것은,
"손목을 잘라야겠다" 다.
자기를 파괴하면서까지 가고 싶지 않은 곳.
손목을 자르면서까지, 억지로 닮고싶지 않은 것.
그래서 스스로 붉음을 만들어내고.
봄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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