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말 - 마종기
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마종기,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원래 마종기 시인의 다른 시집을 사고 싶었는데,
없어서 이걸 샀다. 가끔씩 떠오르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라는 말.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서,
'사랑의 나라'는 소중하니까 안 보이는 걸까.
아득하게 닿을 듯 아련하게 그리워만 하는 사랑의 나라.
마지막 연이 진짜 좋다.
마종기 시인의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의 표4를 좋아하는데(아마도 그 시집 맞을 듯),
젊은 시인일 때부터 이 마음을 담아내셨구나.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내가 행복한 것 잊지 말것.
좋아 보이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잘 잡을 것.
중심을 잃지 말것.
다시 한 번,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